서울대학교 문화예술원 전시 〈퓨쳐스케이프: 만약의 세계〉를 찾아 방문한 파워플랜트는 교내 전력 시설에서 문화 공간으로 용도가 전환된 뒤에도 큰 외관의 변화 없이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여전히 정확한 역할은 모르지만 그저 있는가 보다 하며 지나칠 만한 낡은 학교 시설물 중 하나로 여길 만한 모습이었다. 닷새 동안만 진행된 전시를 놓치지 않기 위해 관악산입구역에서 공용 전기자전거를 빌려 서둘러 찾아왔다. 화물 운반을 위해 크게 뚫린 건물 서쪽의 대문이 아니라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동쪽이 입구인 점은 의외였다. 입구 근처 지상에 세워 둔 입간판이 하필 바람에 쓰러져 있어서, 나는 마치 우연히 일치로 다다르게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곳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 계단을 따라 전시장으로 내려섰다.
늦봄 오후의 햇볕이 내리쬐어서 계단을 내려가 마주한 입구도 몹시 환했다. 등나무 덩굴이 무성하게 뒤덮여 있어서 마치 버려진 군사시설 아니면 어느 장르물 속에 나오는 안전가옥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모험을 떠난 주인공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장소를 통과하면 전혀 다른 세계나 시간으로 이동한다는 설정은 익숙하다. 전시 제목으로부터 ‘미래’라는 키워드 하나를 단서로 움켜쥔 채 실내로 들어서며, 나는 이곳을 시간 여행자를 위한 터미널로 생각하면 어떨까 했다. 저 안에는 필경 여러 가지 미래가 은색 쟁반에 놓여 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그중 하나를 골라 저 너머의 빛나는 출구로 빠져나가면 선택한 미래에 도착하게 될 듯한 예감이었다.
어두운 전시장에 들어서 암적응의 시간을 거친 뒤 마주한 내부는 전시와 전시가 아닌 구역이 엄격히 구분되지 않은 널찍한 창고 같은 공간이었다. 입구에서 가까운 동남쪽 모서리에 비스듬한 햇빛이 들어오는 곳에 신정균의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 〈호이스트〉, 〈발끝으로 걷는 사람〉이 먼저 보였다. 세 작품이 공유하는 공간적 배경은 ‘대피소’로 명명되었을 뿐 특정하기 힘든 낡은 산업 시설이었다. 알고 보니 퇴역한 한강 취수장이었던 그 공간은 자연스럽게 전시장의 연장으로 읽혔다. 각 작품 속에 곡예사는 빡빡한 대형 기어를 몸을 실어 힘껏 돌리거나 눈을 가린 채 기계의 곡면 위에서 균형을 잡는가 하면, 빗물이 떨어지는 천장에 매달린 줄을 타고 오르기도 했다. 절제되고 위태로운 그의 움직임은 어떤 탈출을 시도하는 과정 또는 준비 운동으로 느껴졌다. 산업을 위해 설계된, 개인을 압도하는 대형 공간 속에서 인간은 오랫동안 하나의 부품이었고, 규율에 따라 물리적인 소임을 수행하며 신체를 마모시켜 왔다. 미래에 우리는 그러한 역할을 벗어나 독자적이고 우아한 몸짓을 취해볼 수 있게 될 것인가?
전시장 중앙에는 같은 작가의 〈Ambush Position〉과 〈Set Usage Guidelines〉가 위치했다. ‘백엽상’이라는 이름을 간신히 기억해 냈다. 기능을 다한 기구를 둘러싼 모래주머니들이 게릴라전의 참호를 이루었다. 모래주머니는 파워플랜트에 있던 것들이라고 들었다. 벽면 LED로 점등된 안내 문구는 촬영 수칙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주의 사항과 경고를 깜빡이며 전하고 있었다. 인접한 작품의 등대가 비추는 둥근 빛은 주기적으로 그 참호를 훑고 지났고 그와 함께 백엽상의 그림자가 시곗바늘처럼 돌았다. 나는 참호 밖에서 마치 단체 줄넘기에서 뛸 차례가 된 것처럼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을 느꼈지만, 물론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떤 태세를 갖추어야 할 것 같은, 강한 행위성을 내포하는 분위기에 비해 그 행위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은 상황. 나는 순간 추리소설 속 밀실 사건처럼 은폐된 내막이 있거나, 아니면 나를 속이기 위해 꾸며진 가짜 현장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가짜 현장? 이쯤에서 나는 시선을 들어 전시장을 다시금 둘러보며, 전시 제목 중 ‘세트’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이곳은 무대였다. 전시는 도래할 미래의 장면을 완성된 상상의 결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미래-장면의 조건을 설정해 두고 출연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보일 주저함, 숙고, 당황, 호기심, 불안 등의 태도가 그 장면을 완성할 것이었다.
무대라는 메타포는 연준성의 〈내가 지금 뭘 마시고 있지?〉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제시되었다. 두 폭의 무대 배경이 펼쳐져 있고, 몇 부의 시나리오가 그 위를 영상으로 채웠다. 극 중 한 명은 과거의 자료를 바탕으로 알지도 못하는 사실을 지어내는 비서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고, 질문자의 눈치를 보고 의중을 읽는 것 말고는 스스로 진실을 액세스할 수 없는 이상한 추론 방식에 대해 토로하고 있었다. 비슷비슷한 질문에 대해 때로는 연출된 호들갑으로, 때로는 힘 빠진 심드렁함으로 응답하는 모습은 미리 짜여 있는 시나리오를 연기하는 배우의 존재를 생성형 언어모델의 문법에 겹쳐 드러내 보였다. 두 사람 간의 일상적인 대화는 다음 장면에 이르러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고조되어서, 국가 간 핵폭탄 미사일 발사를 결정(또는 추측)하는 가상의 쇼에 이르렀다.
나는 알쏭달쏭한 극의 내막을 알게 되리라는 기대로 무대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기에는 본 연극의 뒷면에 해당하는 장면이 전개되고 있었다. 자이로 센서가 달린 머그잔을 돌림으로써 상영되는 영상의 관점을 바꾸어 가며 살펴볼 수 있었다. 계속되는 대화는 드디어 전시장 북쪽에서 모두를 비추는 철제 등대에 가 닿았다. 등대는 전시장의 주 조명으로 기능하며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맴돌 뿐 변화하지 않고 밝힐 뿐 제시하지 않았다. 등대는 방향을 제시하는 가이드이자 희망의 상징이 될 수도 있지만 작품의 맥락에서 그것은 고정된 감시의 눈길이자 해소되지 않는 불안으로 다가왔다. 사방을 비추는 등대도, 모든 질문에 즉각 답변하는 AI도, 360도 구석구석을 볼 수 있는 유리구슬도 미래에 대한 유의미한 단서를 내놓지는 못했다. 무대 앞뒤를 샅샅이 뒤지며 답을 찾으려 했던 나는 한 편의 부조리극에 참여한 자원자가 되었다.
퓨쳐스케이프, 즉 미래의 전경으로 소개된 이 전시의 중심으로 진입할수록 AI라는 화두가 이산화탄소처럼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생성형 AI는 과거를 소화해 특정한 미래를 짜낸다. 그 활동으로 인해 미래는 빨리감기되어 우리에게 더욱 빠르고 즉각적으로 도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막연하게 꿈꾸었던, 가능성과 진정한 변화를 품은 ‘진짜 미래’는 왜인지 자취를 감추고, 불확실이 가득하지만 이미 정해져 있는 듯한 모순적인 ‘뻔한 미래’가 그 자리를 채웠다. 기술과 자본을 독점한 소수가 제시하는 마케팅된 미래 앞에 개개인의 선택은 점점 무의미해진다. 동시에, 개인의 삶의 궤적을 결정하는 변수들은 점점 극단화되며 한 치 앞을 볼 수 없게 한다. AI는 과거를 재료로 미래를 만들어내는 도구로 개발되었지만,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꿔놓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것은 협력자인가? 예언자인가? 자객인가? 허수아비인가?
그에 대한 조금 더 직접적인 견해를 이성현의 〈창작의 나무〉에서 찾을 수 있었다. 작품의 영상과 함께 재생되는 음향은 다른 작품의 등대와 더불어 전시장의 막연한 불안을 더하고 있었다. 겹겹이 중첩되는 디지털 사운드와 나레이션, 그에 반응하며 빼곡하게 밝아지는 나무의 이미지. 가지에 잎이 더해지며 풍요로워지는 듯했던 나무는 이내 어떤 빈틈도 남기지 않고 모두 채우며 여백 없이 빛으로 타올랐다. 참신함이나 유일성 같은 창작물의 기준과 저작 활동의 주도권이 기술에 의해 잠식된다면, 결국 예술가 없는 예술만 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작품은 한 갈래의 미래를 펼쳐보고 써 내려간, 덤덤하지만 진심 어린 경고이자 창작자의 앞당겨 쓴 유언이었다.
전시장의 가장 안쪽, 거대한 출구로 나아가기 전에 마주치는 이재진의 〈텍스트 템플〉은 빛과 열을 이용해 공중에서 바닥으로 메시지를 뿌리는 설치 작품이었는데, 그 방식은 두 가지였다. 문장 자체는 레이저를 통해 찰나의 빛으로 바닥에 있는 블록에 투사되는 한편, 그 문장을 생성한 GPT의 단어 선택 과정은 영수증용 종이에 열로 전사되어 쉴 틈 없이 출력돼 바닥에 쌓여 갔다. AI가 하나의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은 수많은 선택지를 검토한 후 확률과 가중치를 바탕으로 하나를 골랐음을 뜻하며, 스마트폰이나 개인 컴퓨터에서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답을 반환하는 언어모델도 실제로는 큰 에너지와 자원을 소모한 결과임이 분명하다. 작품은 메시지의 내용 그 자체, 그리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물리적 구조와 자원 중 어느 것에 본질이 있는지 묻고 있었다.
얼마 전, 서울대학교를 포함한 국내 연구 기관들이 전력 부족으로 인해 AI 연구에 차질을 빚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고성능 그래픽 카드와 방대한 전기를 필요로 하는 AI 연구는 그에 상응하는 물리적 인프라를 전제로 한다. 기사는 서울대로 들어오는 송전선 용량이 이미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추가 전력 확보가 쉽지 않아 보인다고 덧붙였다. 시대는 언제나 더 크고 강력한 발전소와 새로운 공장을 요구한다. 새로운 인프라는 더 이상 우리 주변에서 연기와 굉음을 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동하게끔 준비될 뿐이다. AI와 클라우드 컴퓨팅을 가능케 하는 데이터 센터들은 우리의 눈에서 멀어져 있지만, 알고리즘과 행동 유도를 통해 우리의 미래를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결정한다.
〈퓨쳐스케이프 세트〉가 열린 파워플랜트는 수십 년간 학교의 전기와 난방을 책임졌던 시설이었지만, 기술이 옮겨 가면서 정지된 공간으로 남았다. 자본과 권력에 의해 이끌리는 시간의 주류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순간들이 있고, 그런 틈은 잠시나마 다른 미래를 모색할 수 있게 한다. 그 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약속된 미래가 정말 유일한 것인지, 아니면 더 많은 가능성을 가리고 있는 미끼로서의 미래가 아닌지 의심해 보는 것이다. 명상과 준비운동으로 대비 태세 갖추기, 낯섦의 감각을 회복하기, 본질과 부산물을 구분하기, 불안을 꺼내고 기꺼이 대화하기……. 나는 이런 몇 가지 의심의 방편들을 주워 담은 채 시간 여행자의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지상에 세워둔 전기자전거는 딱 정문까지 돌아갈 만큼의 배터리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