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할 수 없던 B, 선뜻 선택하기 어려운 D, 그리고 그 사이 무수한 C라는 잔인한 운명. 어쩌면 우리가 B와 D를 생일잔치와 장례식이라는 의례로 성대하게 기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도, 왜 내 앞에 놓였는지도 모를 C를 매 순간마다 해 나가야 하는 고된 여정의 시작과 끝을 성대하게 기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에게 최소한의 존엄을 약속한다. 불가피하게 나서게 된 지난한 여정이지만 네가 태어난 건 분명 가치 있는 일이고, 그 끝에 필연이 찾아 와도 살아있는 자들은 너를 유의미한 존재로 기억할 것이라는 약속. 때에 맞춰 서로의 존재 가치를 보증해주겠다는 두 ‘선택’은 공동체의 안전핀으로 기능하며 수많은 폭발을 막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일잔치는 주로 지인들과 개최되지만, 생일카페(이하 생카)처럼 조금 특별한 생일잔치도 있다. 생카에 잔치의 주인공은 거의 참석하지 않는다. 주인공을 위시하여 모인 이들이 모여 주인공과의 추억을 나눈다. 이런 점에서 생카는 오히려 장례식과 닮아 있다. 조금 기묘하긴 하지만, 대상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생일잔치의 근본적인 취지에는 들어맞는다. 그러나 장례식은 취지와 달리 살아있는 이를 대상으로 거행되기도 한다. 2024년 10월, 어느 아이돌 그룹 멤버가 사생활 논란으로 인한 활동 중지로부터 복귀를 발표하자 팬들은 기획사 사옥 앞에 1,000개가 넘는 근조 화환을 세웠다. 단체나 이념에게 죽음을 선고하는 시위 성격의 장례식은 예로부터 있어 왔지만, 그날 세워진 화환은 소속사뿐만 아닌 해당 멤버에게도 사망을 선고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OOO(멤버 이름) 아웃.” 이 상징적 장례식은 대상의 삶을 기념하지도, 기억을 약속하지도 않았다. 대신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을, 기억 속에서 죽을 것을 선고했다.
그날 장례식의 주인공은 왜 죽어야만 했을까? 그건 그가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선택한 대가로 부여된 책임을 어겼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팬덤이 아이돌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동시대 팬덤 문화 속에서 무결함만을 내비쳐야 하는 책임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 책임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책임을 선택한 결과는 어째서 죽음이었어야 했을까. 나는 그의 사생활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또 아이돌이 되겠다는 그의 선택이 불가항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보다는 아이돌이 되겠다는 선택이 어쩌다 다른 한쪽에게 ‘죽음’을 선언할 수 있는 권리를 양도하는 선택이 되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2

Lucas Jennis, 「De Lapide Philosophico」 속 삽화(1625).
“왜 ‘용서받지 못할 주문’이라고 부르지?”
“금지 마법이니까요. 그 중 하나라도 사람에게 썼다가는…”
“곧장 아즈카반 행이지. 정답이다!”
-무디 교수와 헤르미온느의 대화, <해리 포터와 불의 잔> 중
아이돌은 우상(idol)이라는 그 어원처럼, 선망받을 만한 무결함을 요구받는다. 팬들은 그 무결함을 사랑한다. 나 같은 범인(凡人)과는 다른 빼어난 외모, 춤과 노래 실력, 그리고 무엇보다 넓은 마음과 거세된 성욕(같은 그룹의 멤버를 향할 시엔 은밀히 환영받는다). 이상적인 아이돌은 팬이 어떤 모습이든 사랑하며, 나쁜 말이라고는 하는 법이 없다. 연애와 섹스도 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 약간의 인간다움은 보여줘야 한다. 물론 범인에게는 결점이라고 여겨지지도 않을 아주 순한 맛으로. 그래야 팬들이 “OO이도 결국 인간이었어!”라며 더 깊게 빠져들기 때문이다. 선망받을 만한 무결함으로 거리를 느낄 때쯤, 나도 너와 같은 인간임을 살며시 확인시켜주는 몸짓. 케이팝 아이돌의 행동 강령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강령은 존 버거가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언급한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아이돌의 몸에 각인된다.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신감의 고독한 형태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당신을 부러워하는 사람들과 당신의 경험을 나눠 갖지 않음으로써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은 당신을 관심을 갖고 보지만 당신은 그들을 관심을 갖고 보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그렇다면 선망을 덜 받게 될 것이다. (…) 관료들의 권력이 바로 그들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권위 속에 있듯이, 매력적인 인물들의 힘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행복 속에 있다.” (강조는 필자)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1972)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자신의 꼬리를 먹는 뱀 우로보로스는 영원한 순환을 상징한다. 예로부터 신비와 미(美)는 그 머리와 꼬리였다. 누군가를 선망하여 숭배한다는 것은 그가 풍기는 신비로움 속에 있다고 생각되는 헤아릴 수 없는 미를 숭배하는 것이다. 아름다울수록 신비로워지고, 신비로울수록 아름다워진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숭배받는 자는 고독해진다. 그는 신비로워지기 위해 숭배자들과 최대한 멀어져야 한다.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아름다움의 이유는 불투명해지고, 그 흐릿함에 숭배자들의 눈은 멀어 간다. 역사 속 신과 영웅들이 필멸자들에게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반면 아이돌은 항상 모습을 드러내되 팬과의 거리를 들키지 말아야 한다. 항상 팬 곁에 있으며 그들을 생각한다고 말하면서도, 팬 같은 범인이 되거나 특정 팬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은 금물이다. 미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나와의 거리를 짐작할 수 없는 존재. 이 감각이 결국 그가 나와 별 다를 것 없는 한 명의 사람이라는 감각을 마비시킨다.
여기에 기획사는 팬덤으로부터 최대한의 수익을 뽑아 내기 위해 타이쿤2) 감각을 덧붙인다. 닿을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지만, 그의 성공은 숭배자에게 달려 있다. 아이돌 스캔들에 자주 보이는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와 같은 반응은 여기에 기인한다. 이 모순적인 감각이 팬들을 도취시키고 칼을 쥐게 한다. 돈이 문자 그대로 생사를 가르는 신자유주의 사회 속에서, ‘너의 돈을 만들어 주는 것은 우리’라는 사고는 ‘내가 너의 삶(돈)을 만들어 줬으니 언제든 죽음(노동의 박탈)도 만들어줄 수 있다’와 같기 때문이다. 구매자는 칼을 쥐고, 판매자는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다. 물론 이 원리가 케이팝 아이돌판에서만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아래 모든 거래형 노동의 작동 원리인 이것은 이미 곳곳에서 무수한 ‘장례식’을 낳고 있다. 감정이든 물건이든 무언가를 산다는 것은 판매자의 삶(돈)을 만들어 주는 것이기에, 구매할 때 만큼은 구매자가 우위에 선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확 ‘찌르거나’ 매장해버릴 수 있다. 꼭 실제로 구매할 필요도 없다. 상대가 잠재적 판매자라고 생각되는 순간 잠재적 구매자인 내가 칼을 쥔다(<백종원의 골목식당>에서 빌런으로 낙인찍힌 점주들을 향했던 난도질을 생각해보라). 칼이 두려운 판매자는 문제가 생길 시 사과도 반품도 재빠르게 진행한다. 상징적 장례식을 개최받은 기획사가 이틀만에 멤버를 탈퇴 처리했듯이.
그럼에도 이 논리가 케이팝 아이돌판에서 조금 유달리 작동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아이돌과 팬의 관계는 단순한 거래 관계를 넘어선 친밀성 관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무결한 우상인 한편 팬의 애인/친구/동생/자식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아이돌은 직업 중 드물게도 유사-애인/친구/가족을, 그것도 ‘팬’이라는 불투명한 덩어리로 인식될 뿐인 이들을 인간 대 인간으로서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의 인간성과 사생활이 곧 그의 상품이고, 으레 사람들은 식당 주인보다는 애인/친구/가족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더 쉽게 실망하기 때문이다. 기대가 클 수록 실망도 큰 법. 도저히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우상이 나를 생각한다는 벅참과 그 존재를 다름 아닌 내 손(돈)으로 키워 냈다는 도취감의 융합. 이 기이한 융합이 결국 한 개인의 죽음을 멋대로 선언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결국 아이돌로서의 길을 선택한 이는 다음과 같은 주문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 OO아, 나는 너를 믿고 키워 낼 거야. 너에게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의무가 있어. 날 실망시키면 너는 죽게 돼. 근데 너는 내가 누군지 평생 모를 거야.”
3

<케이팝 장례식 카페> 포스터.

<케이팝 장례식 카페> 인포.
“앙 딱 정리들어갈게 내가 안했으니까 걱정마”
-모 아이돌이 영상통화 팬사인회 중 욕설 논란에 팬들에게 보낸 메시지
케이팝 산업이 부여하는 주문이 아이돌의 상징적 죽음뿐만 아닌 실제 죽음까지 촉발하고 있는 지금, 의미심장한 전시가 열렸다. 팀 Re:verse가 기획한 <케이팝 장례식 카페>는 가상 아이돌 장갑철의 ‘죽음’을 생카와 장례식을 합친 형식으로 기념한다. 의례의 주인공 장갑철은 주문의 금기를 수없이 위반했다. 담배, 무헬멧 오토바이, N다리 연애, 탈모, 수염자국, 빠혐3), 무식한 발언들···. 나를 모르더라도 돈과 시간을 들여 탄생을 축하해주고 싶던,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것만 같던 팬들의 사랑은 이제 죽음의 화신이 되어 그에게 죽음을 선고하러 왔다.

<케이팝 장례식 카페> 빈소 공간.
케이팝 팬덤 문화 속 극단적인 애증의 양태라 할 수 있는 두 의례를 합친 전시의 형식은 아름다움이 빚어낸 무덤을 고발하는 듯하다. 전시장 가장 안쪽에 설치된 빈소는 무덤의 구조를 넌지시 드러낸다. 제단 뒤 모니터 속에서 화려한 조명 아래 퍼포먼스를 보이는 갑철이의 모습은 자신의 무덤이 자신의 미에 의해 빚어졌음을 입증하는 동시에 갑철이 스스로가 이를 기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름다웠기에, 아이돌이었기에 사랑도 받고 죽음도 받은 갑철이는 이 장소를 마지막으로 불타 기억 속 가루로만 남게 될 것이다. “갈 때도 예술로 가는” 갑철이의 마지막 모습은 조문객에게 묻는 듯하다. 이 춤은 용서를 구하기 위한 구애의 춤일까? 아니면 주문에서 해방시켜줘서 고맙다는 기쁨의 춤사위일까? 죽은 자는 말할 수 없는 법. 그의 단말마를 해석하는 건 조문객의 몫이지만, 어쩌면 죽음 덕에 범인으로 부활할 갑철이가 직접 답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접객실 내 제단.

접객실 내 카페 공간과 메시지 공간.
빈소에서 조문을 마친 조문객은 생카처럼 꾸며진 접객실로 안내된다. 여기서 관람객은 또 하나의 제단을 마주한다. 아이돌 생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컵홀더 타워와 함께 갑철이의 생전 행적으로 꾸며진 제단은 빈소보다 더 적나라하게 애증의 양태를 드러낸다. 대상의 탄생을 축하하는 듯한 외피를 두른 채, 진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갑철이의 만행과 ‘리즈 시절’ 사진들이 난잡하게 뒤섞여 화려하게 꾸며진 이곳은 과시적 공간처럼도 보인다. 우리가 너를 이만큼 사랑했기에 너를 죽일 수 있다는 권한과, 너를 죽인 것은 네 선택이고 우리는 너의 사랑스러웠던 모습을 기억하며 보내주고자 할 뿐이라는 변명의 과시. 그런 의미에서 제단은 장례식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단은 전시장 내에서 가장 눈에 띄도록 장식된 채 상징적 장례식의 폭력성을 낭만스럽게 포장한다.

카페 공간의 메뉴판.
가장 화려한 건 제단이지만, <케이팝 장례식 카페>의 접객실은 조문객에게 감사를 전하고 슬픔을 나누는 본분을 잊지 않는다. 제단 옆에 마련된 카페에서 조문객은 음료를 받고 갑철이에게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를 작성할 수 있다. 장례식에서 주로 제공되는 세 음료 ‘마님은 왜 갑철이의 밥을 뺏었을까’(식혜), ‘을x갑은 끝난 사.이.다.’(사이다), ‘갑프의 눈물’(생수)은 조롱조로 지어진 이름으로 갑철이를 추모하는 동시에 조문객으로 하여금 갑철이의 만행을 되새기게 한다. 메뉴판 구석에는 모니터 바깥을 향해 계속해서 묵례하는 갑철이가 있다. 마치 모니터 밖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단 해야하니 한다는 듯 좌·우·정면을 향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묵례는 지금까지 사랑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이자 주문에서 해방시켜 줌에 대한 감사로도 보인다.

전시장 내 메시지 공간의 메시지 보드.

어느 조문객의 편지.
조문객들이 포스트잇과 편지를 써 붙이는 메시지 공간은 전시의 주제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곳은 갑철이의 아이돌이 되겠다는 선택에 따른 책임인 ‘죽음’이 과연 정당한지 직접적으로 묻는다. 포스트잇 중에는 “OOO(실제 아이돌 이름)이랑 같이 손 잡고 잘 가시게”, “갑철이 유병장수해서 꼭! 고통받자!”처럼 저주하는 것도 있고, “끝까지 응원할게”처럼 응원하는 것도 있다. 편지도 마찬가지다. 이 상반된 반응은 결국 선택에 관한 책임의 범위를 어디까지 두는지에 대한 차이에서 오는 듯하다(서두에 언급한 실제 ‘장례식’에서도 모든 팬이 그의 탈퇴에 동의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완벽하지 않은 것을 사랑할 용기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완벽한 것을 사랑할 수는 없다. 완벽한 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거세된 우상을 세워 이데아적 사랑의 실존을 꾸며 내는 한 산업이 이를 교묘히 은폐하고 있을 뿐이다.

전시장 곳곳에 배치된 화환.
전시장 곳곳에 세워진 화환은 전시의 시발점이 된 실제 사건을 은근히 적시하는 한편 갑철이의 사인(死因)이라고 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 논리를 압축적으로 제시한다. 터치 몇 번과 요청사항 입력, 그리고 결제라는 너무나 익숙한 감각으로 주문된 의견들은 구매자, 즉 우위로서 칼을 쥔 팬덤의 위치를 과시한다. 우상에게까지 닿기 어려운 감정은 구매를 통해 물질로 변모하여 쉽게 전달된다. 구매로 키워진 갑철이는 구매로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 일반적인 근조 화환과 달리 죽이기 위해 세워진 화환의 이파리는 마치 톱날처럼도 보인다. 여러 화환 중 대장 노릇을 하듯 홀로 서 있는 한 화환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좋아한 걸 쪽팔리게 하는 놈은 죽어야 한다, 이런 말이 있어.” 대장으로서 주문(呪文)의 결과를 고하는 주문(主文)인 셈이다.


갑철이의 ‘죽음’을 촉구하는 시위 트럭.
전광판의 검은 바탕 위에 선명한 색으로 쓰인 원망들이 명멸하며 배회한다. 전시 기간 동안 근처를 순회한 후 전시장 내에 주차된 시위 트럭은 근조 화환과 함께 구매자의 권력을 과시한다. 고객님이 주문하신 메시지를 최대한 선명히 전하기 위해 온통 검게 칠해진 트럭은 자신을 최대한 낮춘 채 고객님을 대우한다. 트럭은 화환과 달리 메시지를 얌전히 전달하길 거부한다. 메시지가 닿지 않을 이들을 위해 친히 몸을 움직여, 고인의 사인까지 세세히 적은 부고장을 마구 배부함으로써 불특정 다수에게 팬덤의 권력을 선전한다. 화환이 얌전히 내민 칼이었다면, 트럭은 그것이 내보이는 글씨처럼 대놓고 번쩍이며 목을 겨누는 칼이다.

전시 워크샵 <갑철재판: 갑철아, 너 진짜 XX했어?>
전시 마지막날 진행된 워크샵 <갑철재판: 갑철아, 너 진짜 XX했어?>는 2부로 나뉘어 진행된다. 1부에서는 갑철이의 수많은 만행을 살펴보며 참여자들이 직접 진실와 거짓을 가려 본다. 각자의 활동지 작성 끝에 진행자가 공개한 정답은 “사실 아무도 모른다”다. 허무해보이는 이 결론은 매일같이 개떼처럼 기사화되는 아이돌의 행적들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 없다는, 당연하지만 통용되지 않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2부에서 참여자들은 갑철이의 승천을 염원하며 갑철이의 포카를 탑꾸4)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 탑꾸는 입관식과 닮아 있다. 참여자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곧 가루가 될 갑철이를 정성스레 염한다. 평안해 보이도록 꾸며져 탑로더에 모셔진 갑철이는 마지막날인 셋째날이 되어서야 승천할 준비를 마친다. 갑철이는 승천할 수 있을까? 이렇게 누가 변호도 해주고, 정성스레 염도 받았으니 승천을 넘어 성불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입관식의 취지가 그렇듯, 덕분에 팬들도 조금은 편하게 그를 보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요소를 경유해 <케이팝 장례식 카페>는 동시대 케이팝 산업과 그 소비자들에게 다각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직설적으로 묻는다. 갑철이는 죽어야만 했는가? 그의 무덤을 마련한 건 전시지만, 일반적인 무덤이 아니었다. 전시가 마련한 건 낱낱이 파헤쳐진 채 자신의 내부를 관람객에게 훤히 열어 보이는, 그 안에서 망자가 말을 걸어오는 무덤이었다. 이는 아이돌을 선택하는 이는 무결해야 하며 ‘죽음’도 각오해야 한다는 케이팝 세계 속 진실을 묵인해 온 모두의 욕망이 함께 묻힌 무덤을 구태여 소환하고 파헤쳐내 보이려는 시도로 보인다. 사형이 선고될 만한 반인륜적 범죄-이를테면 급작스런 비상계엄-도 아닌 흡연, 연애, 소통 부족, 욕설 등을 이유로 살아있는 개인이 죽음을 선고받는 게 과연 정당한 일인가? 아무리 그가 그 직업과 그에 따른 책임을 ‘선택’했다 할지라도? 전시는 물을 뿐 직접 답을 내리지 않지만, 답은 명확하다. 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한 사람의 인격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직업 따위도 없다. 기이한 산업의 메커니즘과 이를 유지시키는 판매자와 소비자만이 있을 뿐이다.
4

츠키요카 요시토시, <미나모토노 우시와카마루와 구마사카 조한의 대결>, 목판화, 1883.
관객은 열띤 연길 보고 때로 울고 웃으며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 착각도 하지만
끝나면 모두들 떠나버리고 객석에는 정적만이 남아 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샤프, ‘연극이 끝난 후’ 중
다시 “누칼협”으로 돌아와보자. 만약 갑철이가 무덤에서 뛰쳐 나와 억울함을 호소한다면 어떨까? 자신은 팬들에게 칼을 쥐어주는 데에 동의한 적이 없으며, 한 명의 사람으로서 남들 다 하는 ‘실수’를 했을 뿐이라고. 분명 그에게 돌아올 대답 중 하나는 “그러게 누가 아이돌 하라고 칼 들고 협박함?”일 것이다. 공개적으로 담배도 피우고 연애도 하고 욕도 하고 싶으면 아이돌을 안 하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누칼협”에 맞서 갑철이도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누가 내 팬 하라고 칼 들고 협박함?” 이때 각자의 고통은 각자가 알아서 떠안아야 할 책임이 되고, 대화의 가능성은 짓밟힌다. 결국 “누칼협”은 그 누구도 구원해주지 않는다. 고통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시킴으로써 서로에 대한 구원을 끝없이 지연시킬 뿐이다.
나는 신자유주의의 잔인한 원칙이 현시대에 “누칼협”을 소환해냈다고 생각한다. 노동을 통한 소득과 소비라는 우로보로스적 원칙 아래, 우리 중 대부분은 판매자와 구매자를 번갈아 맡아야만 한다. 지금 내가 칼을 쥔다는 건 곧 칼을 마주한다는 것이다. 언제든, 누구든 사지로 내몰 수 있는 이 잔인한 원리가 “누칼협”에 양분을 공급한다. 팔지 않으면 죽는 사회에서, 내 의지로 선택했다고 믿고 싶은 임무를 맡아 칼을 마주하며 번 턱없는 보수로 내린 선택이 응당한 대가를 주지 못하면 억울한 마음에 칼을 쥔다. 칼을 마주한 상대의 변명은 중요치 않다. 나에게 응당한 대가를 줘야만 하는 임무도 상대가 ‘선택’한 길이니까. 그렇게 믿어야만 견딜 수 있는 사회 속에서 “누칼협”은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자위하는 주문으로 기능한다. 나도 ‘선택’에 책임지느라 힘든데, 너도 당연히 힘들어야 하지 않겠냐는 이 주문은 ‘준 만큼 받아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환상을 강화한다(그러나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대다수가 주는 만큼-일한 만큼-받지 못한다는 데 있다). 준 만큼 못 받고는 못 살겠다는 이 마음이 결함을 용납하지 못하게 하고, 완벽하지 못한 것을 사랑할 용기를 갉아 먹는 동시에 무결한 것을 향한 사랑의 실현이라는 불가능한 욕망을 맹렬하게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닐까?
불가능한 욕망은 죄가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는 건 당연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욕망이라기 보다는 필연적으로 미끄러질 것을 앎에도 바라고 마는 환상이다. 대개 그 환상은 쉽게 깨지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실망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일상적으로 되새기는 일이다. 우리는 실망할 수 있기에 대상을 다시 사랑할 구실을 찾아 나설 수 있다. 더이상 구실을 찾을 수 없더라도 쉽게 놓아 줄 수는 없겠지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 죽을 필요는 없고 죽어서도 안 된다. 결함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모든 존재의 생득적 운명을 생각하면 상대를 실망시키는 건 존재의 조건과도 같기 때문이다. 케이팝 산업은 이 진실에 무도한 주문을 걸어 환상을 배양하고 있다. 여기 절대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 이 자는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친밀성 욕구를 채워 줄 넓은 마음을 갖고 있다. 이 자는 불평하지 않는다. 당신에게는 (돈으로써) 그에게 삶을 부여할 자격이 있다, ···.
그 주문을 버티지 못한 많은 갑철이들을 떠올리며, 서두의 질문에 답할 시간이다. 아이돌이 되겠다는 선택은 어쩌다 다른 한쪽에게 ‘죽음’을 선언할 수 있는 권리를 양도하는 선택이 되었는가. 등가교환 환상을 배양하는 신자유주의와 이를 활용해 무결한 것을 향한 사랑의 실현이라는 환상을 전파하는 케이팝 산업이 함께 펼쳐 낸 가림막이 무대 뒤 진실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오늘도 아이돌은 춤추고 노래한다. 그러나 아이돌만이 아니다. 연극이 끝나면 우리도 각자의 소극장으로 돌아가 무대에 오를 채비를 해야 한다. 어느 무대든, 관객 앞에서 가림막은 열리지 않는다. 그 뒤를 꿰뚫어 보고, 들추고 들어가 악수를 청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매혹적인 연극은 우리를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게 만드는 법이지만, 그 누구도 연극 속에서만 살 수는 없다. 가림막 뒤에서 우리는 모두 불가능한 욕망에 따른 ‘선택’에 울고 웃고, 실망하고 사랑하는 하나의 결함투성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일상적으로 되새기길 게을리 하지 말자. 서로에게 칼을 겨누기 보다 함께 거대한 칼에 맞서 거두도록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