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 있었던 것이 벌써 2016년의 일이다.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바둑을 잘 둔다는 이세돌과 구글에서 인간을 모방해 개발한 AI 알파고의 대국. 그 대결을 묘사하는 언론과 사람들의 반응은 마치 인류와 AI의 최후의 맞대결을 방불케 했다. 5번에 걸쳐 진행된 대국에서 알파고가 4번의 승리 차지하고 이세돌은 단 한 번만 승리했다. 이세돌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 단 한번의 승리에 열광했다. 그 한 번의 승리가 최소한 5:0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한번의 승리를 통해 사람들은 그래도, 아직은, 기계가 인간을 ‘완벽히는’ 이길 수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 안도는 사실 인간이 AI를 상대로 느끼는 초조함과 두려움의 다른 표현이었다. AI는 실수도 없고, 인간보다 훨씬 빠르며 심지어 임금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아무리 봐도 AI가 조만간 나의 일자리를 뺏을 것 같다는 생각을 꽤나 많은 사람들이 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가들은 “AI는 절대 모르는 인간의 감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AI에게 설자리를 뺏기지 않을 마지막 인류 종족”으로 여기며 으쓱해했다. 산업화, 기계화, 규격화된 사회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은 마지막 보루의 수호자, 또 수학, 이성, 합리, 효율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를 표현하는 취한 인간이 예술가들이 스스로의 쓸모를 증명하는 방식이자 자긍심이었다. 이는 로고스, 합리성, 숫자, 효율의 최첨단 결과물인 컴퓨터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인간의 마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한다.
그런데 만약 AI가 예술까지 해버린다면? 그럼 예술가는 이제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하고, 그걸 보고 글을 쓰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Fio의 <나폴리탄 프로젝트>는 기능적으로는 이미 올드스쿨이 되어버린 인간, 이제는 공부까지 스스로 하는 AI,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예술가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진짜 예술은 인간만 할 수 있나? 이 전시 작가가 AI라고 해도?”
<나폴리탄 프로젝트>는 서울대학교 내부 파워플랜트에서 전시되었다. 사고로 죽은 손녀 노바와 똑 같은 AI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할머니 소피아는 자신이 들려주는 무서운 이야기에 전혀 ‘쎄함’을 느끼지 못하는 AI에게 분노를 느껴 AI를 버리게 된다. 버려진 AI 노바는 이 세상의 모든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없애버리고, 노교수L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찾아나섰던 3명의 제자는 AI노바가 고의적으로 모든 스파게티를 없애버렸음을 눈치챈다. <나폴리탄 프로젝트>는 이 줄거리를 들려주는 이미지 전시로, 감상자는 바닥에 분필로 그려진 선을 따라 AI로 생성된 이미지를 보게된다.
음악으로 전하는 복잡다단한 인간의 마음
사실 인간 사회와 예술이 신기술로 인해 대변혁을 맞이한 것은 유래 없는 일이 아니다. 묘사와 기록, 재현의 역할을 담당했던 회화가 사진기의 발명 이후 재정의 되었고, 그 결과의 대표격이 인상주의다. 또 영화의 발명과 함께 연극과 극장은 줄거리 전달 이상의 사명을 스스로 부여했다. 그럼 AI의 출현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또다른 예술 형식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깊은 한숨과 함께 마음 한켠에서는 이런 마음이 욱 하고 올라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어디까지 도망가야되는데…?!”
<나폴리탄 프로젝트>의 바이올린 플레이리스트는 그야말로 AI, 예술과 인간 사이 애증의 서사시 같았다. 연주 프로그램은 쇼팽 <녹턴 20번>, 크라이슬러의 <레치타티보와 스케르초>, 비버의 <파사칼리아 G단조>, 아리아나 그란데의 <땡큐 넥스트>, 김광석의 <편지>로 이루어졌다. 쇼팽과 첫 세곡은 감정적인 측면에서 인간적인 면모가 돋보였다. ‘인간적이다’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쇼팽의 생애나 그가 낭만주의의 대가로 꼽힌다는 점에서, 또 크라이슬러의 레치타티보는 스승이자 친구인 외젠 이사이에게 헌정된 곡이라는 점에서 관계지향적이고 ‘인간의 감정만은 절대 기계가 따라할 수 없다’는 믿음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느껴졌다. 이런 의미부여를 제외하더라도 두 음악의 선율이 나타내는 감정적인 격정은 과연 인간만이 표현할 수 있다고 자만하기 충분한 부분이 있었다. 비버의 파사칼리아 G단조는 바로크 바이올린으로 연주되었는데, 화려하고 기교에 유리하게 개량된 모던 바이올린에 비해 약간은 투박하지만 더 오래되고 거친 소리의 악기만이 줄 수 있는 울림이 있었다.
앞선 세 곡이 투박함, 인간의 서정성 같은 부분을 강조하며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떠올리는 ’AI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성’을 노래했다면, 뒤이어 연주된 아리아나 그란데의 <땡큐, 넥스트>와 김광석의 <편지>는 AI의 에게 설자리를 모두 뺏긴 인간의 쿨한척과 씁쓸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아리아나 그란데의 <땡큐, 넥스트>는 전남자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나열하면서 “너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훨씬 더 멋진 여자가 되었고, 이제 나는 남자친구가 없이도 이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여자다”는 가사의 현대인의 나르시즘적인 연애 서사시다. 알파고에게 참패를 당하고도 AI는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없으며 인간의 설자리는 견고하다고 외쳤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Chat GPT시대에 이르러서는 김광석의 <편지>로 바뀐다.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너는 도대체 왜 쎄하다는 말을 못 알아들어!
<나폴리탄 프로젝트>는 할머니 소피아가 만들어낸 손녀 AI가 ‘쎄하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시작했다. 이 노바 AI가 진짜 노바를 완벽히 대체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할머니가 들려주는 나폴리탄 괴담을 듣고 ‘쎄하다’는 감정을 느끼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면에서 살아있는 손녀와 똑같았던 노바 AI가 ‘쎄하다’는 말은 끝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FIO팀이 AI에게 물어봤을 때, AI는 “나는 몸이 없기 때문에 쎄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몸으로 느끼는 것’는 자신의 한계 밖이라는 AI의 고백일까?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데 불길하고 부정적인 기분을 느낄 때 ‘쎄하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이 ‘쎄하다’는 감정은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곳에 존재한다. 말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나에게 보내는 이 경고는 의식적으로 통제될 수 없는 몸의 영역에서 병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만약 어떤 상황에 대해 느끼는 불길한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이전의 경험을 소환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가능성이라는 수학의 세계의 증언이다. 의식속에 존재하는 기억으로 미래의 상황이 순조롭지 않을 것이라는 가능성의 추측은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식은땀이 나는 몸의 경고로 나타나지 않는다. ‘쎄하다’는 것의 본질은 나의 의식에서 쫓겨난 경험이 무의식의 세계에서 몸으로 전달된다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AI는 숫자, 이성, 논리로 쌓아올린 탑의 최첨단 산물이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이성의 세계 바깥에 있을때만 성립할 수 있는 ‘쎄하다’는 현상을 컴퓨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땅 위에서 헤엄치지 못하는 물고기, 물 속에서 숨 쉴 수 없는 인간처럼.
소피아와 노바의 성은 사실 시몬스였다
전시의 끝에 다다르면 우리는 드디어 AI 노바를 만나게 된다. AI 노바는 시몬스 침대 위에 앉아있는 한 대의 노트북이고 비로소 이곳에서 나는 소피아와 노바의 성이 시몬스였음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마구 뛰어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절대적 양질의 수면을 제공하는 미국산 침대 브랜드 시몬스가 바로 노바의 가문이다. 꿈의 세계를 지켜주는 다국적기업, 가족애를 마케팅하는 자본주의의 승자 시몬스.
시몬스라는 이름의 의미는 <나폴리탄 프로젝트> 전시까지 확장된다. 시몬스의 간접광고가 포함되어있다는 이 프로젝트는 비평문의 시작에서 말했던 예술가들의 생존방식을 전면적으로 뒤집는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원래 설 곳을 잃어버린 예술가들이 스스로를 세상에 저항하는 마지막 보루, 또는 기술이 할 수 없는 것을 해내는 존재로 규정했던 것에 완전히 반대되는 행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 미술과 자본의 밀접한 관계는 이미 굳이 언급하기도 진부하게 되어버렸다지만, 꿈과 인간성을 줄거리로 삼은 프로젝트가 이렇게 당당하게 주인공에게 시몬스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여전히 나에게 어느정도 놀랍다.
<나폴리탄 프로젝트>에서는 예술가-AI, 순수 예술-자본, 인간성-기술, 무의식-의식을 대립쌍으로 바라보는 자의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FIO가 디자이너로 구성된 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나 짐작하고 있다. <나폴리탄 프로젝트>는 이제 케케묵은 예술-비예술의 이분법을 끝내고, 어쩌면 예술과 기술이 환상의 짝꿍이 될 수도 있다는 약간은 섣부른 희망을 심어준 유쾌한 전시였다.
맞춤법 수정을 부탁받은 Chat GPT는 갑자기 이 비평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을 삽입했다.
“쎄하다는 것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복잡한 감정 중 하나로, 이것을 AI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AI를 비난할 이유는 없다. 인간과 AI는 각자의 한계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방향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AI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어 보기로 했고, “AI가 가지는 감정이란 것은 뭔지 말해줘”, “AI가 감정을 가질 수 없는데도 AI는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 “그러면 AI가 만든 예술에 대해서 인간이 비평을 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AI와 인간이 협업하면 새로운 예술의 시대를 열 수 있다고 생각해? 등의 질문을 던져보았다. AI는 나의 질문에 대해 인공지능은 감정이 없고, 예술에 대한 궁극적 판단은 인간에게 달려 있다는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AI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예술적 시너지에 대해서는 긍정적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나에게 주는 정보는 2019년에 마지막으로 업데이트 된 것이라는 사실을 덧붙이며 또다시 열린 결말을 제시했다.
“너는 왜 쎄하다는 말을 못 알아들어!”라는 신경질과 함께 AI와 예술, 예술가의 미래를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