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5일부터 19일까지 서울대학교 68동 파워플랜트에서 디자인과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시각조형실험 수업이었던 ‘디자인기초1’의 결과 발표로 <신체조형 Physical Graphics>(지도교수 디자인과 부교수 이장섭, 공동지도 모던플레잉 김민주, 아티스트 나잠 수) 전시가 진행되었다. ‘신체조형’은 음악을 움직임으로 해석하고 신체를 도구 삼아 그래픽으로 완성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픽’은 그림이나 도형, 사진 등 다양한 시각적 형상이나 작품을 총칭하는 말로서 쉽게 컴퓨터로 하는 작업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시각적인 형상이나 작품을 의미하는 만큼 회화도 그래픽에 속하게 된다. ‘조형’은 인간이 여러 가지 재료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창조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수업에 참여한 44명의 학생은 작가로 참여하여 ‘신체조형’이라는 프로젝트를 석 달 동안 진행했다. 총 9팀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음악을 작곡하고, 그 음악에 맞춰 신체를 이용한 퍼포먼스를 통해 각기 다른 9개의 그래픽을 완성했다.
오프닝 당일, 학생들의 퍼포먼스가 진행되기에 앞서 파워플랜트의 가장 깊숙한 공간에 곳곳에 걸려 있는 작품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을 찍은 영상이 재생되었다. 그 후 본 수업의 지도교수인 디자인과 부교수 이장섭, 문화예술원 원장 이중식 등이 간단하게 <신체조형>에 대해 설명하고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다. 작곡에 도움을 주었던 아티스트 나잠 수는 “음악도 조형적으로 작곡해 보자”라고 생각했다고 밝혔으며, 조형감각과 균형감각을 익혀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움직임을 창의적으로 표현한다는 게 생소했으며, 어떤 움직임을 다룰 것인지, 음악을 통해 움직임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등에 관해 고민했다”고 말했다. 이때, 움직임은 그래픽 표현과 스프레이, 붓 등으로 표현되어 하나의 회화로 완성되었다. <原宿(하라주쿠) in 화성>과 <미지의 동굴, 탐험 그리고 무언가> 두 팀이 오프닝 때 직접 퍼포먼스를 재현하여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신체조형’이라는 단어를 관람자들이 보다 직접적이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퍼포먼스는 음악과 함께 진행되었으며, 퍼포먼스가 끝난 후 공장 안에는 스프레이와 페인트 냄새가 진하게 남아 있어 관객 또한 마치 작가의 작품 생성 과정에 일조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가장 주목했던 것은 바로 이 자리에서 퍼포먼스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과 기존에 만들어졌던 작품 두 개를 비교해 보는 것이었다. 아무리 같은 음악을 틀고, 약속된 행위를 했음에도 두 개의 작품은 완벽하게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의 동일 공간에 사소한 부분의 차이만 가지고 있는, 실상 같은 작품인 두 작품이 걸려 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더불어 이 두 작품은 미리 전시하지 않고, 현장 퍼포먼스가 끝난 후에 그 결과물을 전시했으면 조금 더 의미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된 작품 옆에는 작품의 제목과 간단한 설명과 작업 과정이 적혀있어 관람자의 이해를 도왔다. 작품들을 보다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공간’과 그 공간 안에서 느끼는 감각을 어떻게 행위로 표현하고, 어떤 악기와 사운드를 중심으로 하여 음악을 작곡했는지이다. 오프닝의 첫 번째 퍼포먼스 작품이었던 <原宿(하라주쿠) in 화성>(김지현, 이주영, 이시현, 양지원, 한태희 作)은 몽환적인 우주에서 보내는 감각적인 젊은이들의 밤을 그렸다. 네온 색감은 화려한 젊은이들의 거리 또는 클럽이 연상되며, 그림과 퍼포먼스에서는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함과 에너지가 느껴진다. 이시현은 “미래도시인 화성을 공간으로 삼은 만큼, 일본풍이 느껴지면서도 SF 감성을 담아 미래지향적인 느낌을 살리고 싶었고, 이에 화성 하라주쿠에서 들릴만한 음악을 상상하며 음악 작업을 했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퍼포먼스는 ‘동굴’이라는 공간을 소재로 한 작품 <미지의 동굴, 탐험 그리고 무언가>(권나연, 박민서, 오지승, 이지현, 조은별 作)였다. 동굴에서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바깥세상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에 음악 또한 울려 퍼지는 듯한 사운드를 기반으로 동굴 속에서 느끼는 무언가의 기괴스럽고 으스스한 감정을 표현한 선율을 사용한다. 박민서는 “특정 공간을 설정한 후 그곳에 있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작곡을 하고 몸의 움직임을 구상했다. 이에 동굴이라는 공간에서 느끼는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세이렌>(김필립, 김희서, 이채원, 정지은, 한수정 作)은 심해의 어둡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보다는 바다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움에 집중하여 사람을 유혹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세이렌 신화를 실로폰을 사용한 몽환적인 멜로디를 기반으로 하여 표현했다. 이에 본 작품은 보는 것만으로도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을 느끼게 하며,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을 사로잡았던 작품이기도 했다. 마치 세이렌의 노래에 이끌렸던 오디세우스처럼 말이다. <Luminous : 어둠 속에서 빛나는>(이화인, 홍서경, 김승환, 우지선, 최예원 作)은 동굴의 어둠 속 공간을 탐험하다가 미지의 공간을 발견하며 밝은 분위기로 전환되는 스토리를 담았다. 크기가 다른 두 종이를 겹쳤다가 상대적으로 작고 위에 올라와 있던 종이를 반으로 자른다. 이때 검은색이었던 그림이 반으로 나뉘며 흰색 부분이 나타난다. 이는 미지의 탐험을 통해 발견한 빛을 나타내며,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개미굴>(어현서, 김의진, 전윤서, 양준영, 이다현 作)의 핵심은 ‘미시적 공간’이다. 인간이 아닌 개미의 시점에서 개미굴 형태의 인식을 시도했으며, 복잡한 미로처럼 보이는 구불구불한 개미굴을 표현하기 위해 빠르게 반복되는 박자를 이용하여 음악을 작곡했다. 모래와 가베를 움직여 개미의 노동을 시각적으로 표현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흔적을 보여주기 위해 두 개의 작품을 전시했다.
<802701년 00월 00일>(강유진, 김해욱, 조현욱, 최서이, 홍지우 作)은 미래의 한 순간인 802701년의 어느 날 도시의 한 풍경을 상상하여 만든 작품이다. 그들은 사이버펑크 장르에 나올 법한 도시를 배경으로, 캄캄한 도심 속에서 도주자와 관리자로 이루어진 사회 구성원들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며 긴장되는 대치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마치 빅브라더의 감시하에 형성된 커다란 파놉티콘(Panopticon)으로서의 사회를 연상시킨다. 도화지 위 그들의 퍼포먼스는 마치 한 편의 공연을 보는 듯하며, 결국 다수의 관리자에게 총살당하는 한 명의 도주자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소수를 향한 권력의 폭력성을 시사한다. <지하철>(안수빈, 정인경, 위현서, 황지현, 이서윤 作)은 제목 그대로 일상적인 공간을 주제로 한다. 지하철 내 다양한 사람들의 각기 다른 행동을 포착하여 신체조형으로 변환하고 지하철에서의 여러 소음을 하나의 음악으로 재창작했다. 손잡이를 연상시키는 도구를 이용하여 지하철 바닥에 그려지는 이동의 흔적을 그래픽으로 표현했으며 이는 색색깔로 이루어진 지하철 노선도를 떠올리게 한다. 파워플랜트 내부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을 만큼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헤덤비다>(조민경, 김한비, 이재연, 정영준, 박재용) 또한 일상적인 공간을 주제로 한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딴 생각을 하다가 신호가 끝날 때쯤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횡단보도를 건너는 데서 영감을 얻어, 딴 생각을 할 때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라는 물음에서 시작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헤매며 덤비다, 공연히 바쁘게 서두르다’라는 의미인 ‘헤덤비다’라는 제목처럼 작품에는 빨강, 초록, 노랑 등 다양한 색이 사용되었으며, 이것들이 정신없이 움직이며 섞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를 유유히 지나가는 검은색 점들은 마치 모든 혼란을 무시한 채 유유히 자신의 길을 가는 머릿속의 딴생각을 나타내는 듯하다. <사원>(유규희, 이세영, 전비아, 최준혁 作)은 잊힌 사원을 찾아 떠나는 탐험가들의 여정을 우거진 숲속에 숨겨진 사원을 찾아 떠남, 웅장한 사원의 입구로 들어감, 사원을 발견함이라는 세 가지 움직임으로 표현했다. 음악 또한 기쁨과 고난, 그 속에서의 두근거림이 숲속의 새소리와 조화롭게 이루어져 마치 한 편의 음악극에서의 퍼포먼스를 보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신체조형은 얼핏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이나 행위예술(performance art)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분명 다르다. 액션 페인팅은 ‘그리는 행위(액션)’ 그 자체에서 순수한 의미를 찾기 때문에 결과로써 그려진 그림은 중요하지 않다. 행위예술의 경우 미술가의 신체를 이용하며, ‘보디 아트(body art)’ 또는 ‘라이브 아트(live art)’라고 불리는 만큼 그래픽(회화)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특히, 신체조형은 설계적이고 체계적인 아트 퍼포먼스와 달리 그 자리에서 음악을 듣고, 직접적으로 그때의 생각을 즉흥적으로 표현하는 만큼 명백히 다른 장르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음악과 퍼포먼스, 그리고 퍼포먼스의 결과로써 그려지는 회화가 합쳐져 시각과 청각, 촉각이 결합한 공감각을 퍼포머와 관객 모두에게 제공하여 일반적인 전시와는 확연히 다르고, 독특한 경험을 제시한다.
그뿐 아니라, 이 수업이 디자인과에서 열렸다는 것을 고려해 보았을 때 ‘신체’가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디자인과 학생들은 대개 신체 중 ‘손’이라는 일부 신체 부분을 이용해서만 작품을 그리고 완성한다. 하지만, 그들은 신체조형을 위해 그들의 신체 전체를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즉, ‘손’에서 ‘몸 전체’로 그들의 도구가 확장된다. 이에 박민서는 “일상생활에서 내가 어떻게 행위를 했는지, 특정 상황에서는 어떤 행동을 하고 감각을 느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어 무척이나 즐거웠다. 평상시에는 손만을 이용해 정적인 작업을 해왔는데, 음악과 무용이 결합한 만큼 도전과 탐험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시현 또한 “디자인보다 순수 회화 같은 느낌이었고, 매주 새로운 과제가 주어져 매 순간이 도전이었다. 손은 내 생각대로 움직여지는데, 원하는 동작을 만들고 이를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고 밝혔다. 폐공장에서 4~6명의 학생이 하나의 팀을 이루어 몸 전체를 움직이는 모습은 단순한 움직임이 아닌, 세계를 향해 몸부림치는 몸짓이었다. 전력과 난방을 공급하던 파워플랜트가 현재는 문화 에너지를 불어 넣는 공간으로 재탄생하여, 여러 문화 행사가 활발하게 개최되고 있는 것처럼, 디자인과 학생들은 이 공간에서, 신체조형 작업을 통해 세계와 다시, 또는 새롭게 마주했다.
학생들의 신체 확장은 ‘신체철학’을 주창했던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를 연상시킨다. 전통적으로 서양 철학에서 인간 주체는 ‘사유하는 주체(Cogito)’로서 인지되었으며, 신체는 항상 사유(정신)보다 열등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은 신체를 매개로 하여 세계를 감각하고, 세계와 자신을 매개하며 살아간다. 19세기 프랑스 철학자 멘 드 비랑(Maine de Biran)에서부터 현대철학에서 몸에 대한 담론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신체에 대한 중요성이 커졌다. 대표 철학자인 퐁티는 주체성의 중심을 몸에 위치시키며 ‘육체화된 주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인간이 겪는 최초의 체험은 몸을 통해 세상과 맞닿는 경험 그 자체인 만큼, 개인이 무엇을 한다는 것은 신체를 필연적으로 매개하여서 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신체는 곧 ‘나’이며 우리는 신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가령, 우리는 눈을 통해 세상을 발견하지만, 발견된 세상을 통해 눈의 존재를 역추적한다. 주체는 감각하는 신체를 통해 세계의 드러남을 체험하며, 세계와 상호소통의 과정에서 연결된다. 즉, 몸 자체가 사회적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신체조형에서 학생들이 팀이 되어 함께 각자 다양한 신체와 퍼포먼스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 것처럼, 세계는 나의 몸, 타자의 몸, 그리고 그들의 몸이 함께 어우러져 사회 세계에 ‘살(Fleish)’을 붙여 나가며 구성된다. 모든 팀원들이 검은 옷을 입어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지우고, 하나의 개별적이면서 유기체적인 몸이 되어 세계를 향해 뻗어 내는 몸짓은 단순히 음악에 맞춰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닌, 세계를 향해 그들의 존재를 부르짖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