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이자 이론가 에번 콜더 윌리엄스는 『불균등 결합 종말론』에서 ‘샐비지-펑크(salvage-punk)’라는 용어를 고안했다. 그에 의하면 샐비지-펑크란 “꿈속의 찌꺼기와 한때였던 세계의 진짜 잡동사니로 뒤덮였고, 구제·전용·우회·발췌의 고된 작업으로 가득 찬, 망가지고 죽은 세계에 대한 포스트-아포칼립스적인 전망”1)으로, SF의 한 갈래보다는 문화적 형식이자 물질적 실천으로 제안된다. 이때의 과학소설 혹은 ‘사변적 허구(speculative fiction)’란 물론 사이버펑크로, 1980년대 들어 윌리엄 깁슨의 단편 「불타는 크롬」과 뒤이은 스프롤 3부작을 기점으로 유명해지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대중문화의 중추로 빨려 들어가 버리며 지금의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시각적·서사적 기호들로 포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니 장르로서의 사이버펑크는 『뉴로맨서』로부터 15년도 지나지 않은 세기말만 하더라도 이미 퇴역한 안드로이드 신세였을 테며, 그 잔재를 긁어모아 다른 시대 혹은 장소의 과학기술과 접붙이며 수많은 파생 장르가 생겨났다. 윌리엄스는 그중에서도 스팀펑크처럼 “훨씬 다르고 상냥한 산업적 행로를 따라 후기 자본주의의 결과를 다시 써”2)서 그 파괴적인 성질을 낭만화하는 경향을 비판적으로 점검하며, 사이버펑크를 차라리 후기 자본주의 및 신자유주의 세계가 스스로에 대해 꾸는 꿈 혹은 품은 환상이자 “불모가 된 사변적 미래에 대한 경멸이 아니라 현재 자체에 대한 숨겨진 경멸”3)이라고 칭한다. “현재는 이미 그런 미래가 도려내진 약속”4)이라는 인식을 펑크의 그것과 공유하고 있었기에, 사이버라는 유행어에는 진정으로 ‘-펑크’라는 접미사가 붙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지엽적인 사변과 뒤져버린 미래의 끄트머리에서부터, 가장 ‘지루한 디스토피아’의 꼴로 사이버펑크이기도 한 현재 속에 숨겨져 있던 구제(salvage)가 넝마의 꼴로 출몰한다.
2024년 10월 11~12일 동안 서울대학교 문화예술원 산하의 파워플랜트에서 음악그룹 해파리와 소설가 김초엽의 연계로 열린 행사인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 또한 곳곳에 구제의 기미가 도사리는 듯 느껴졌다. 나는 다섯 번째 암페어(Amfair) 이후 거의 한 해 만에 다시 이곳에 방문했는데, 가을인데도 날씨가 여전히 또 기어이 더워서 숨을 돌리고 땀을 식힌 뒤 공간 한복판에 설치된 큰 무대를 둘러볼 수 있었다. 공연이 열리면 청중들이 둘러앉을 테며 사람 키보다 높은 단상 주위로는 얇고 하얀 천이 비닐 포장처럼 구조물 위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 위로는 말라붙은 식물이 바래가는 색을 띠고 촘촘히 올려놓아져 있었다. 군데군데 다양한 조명과 빨간색 꽃이 장식되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철사부터 종이컵이나 페트병, 또 캔과 담뱃값에 비즈까지 다양한 폐품이 숨어 있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사물들을 부러 ‘쓰레기’라고 부를 수 있다면, “여간해서 포획되지 않는 대상을 고찰하고자 할 때 쓰레기만큼 적합한 대상도 없을 것”이기에 “쓰레기는 그것을 적절한 규모로 사색하려는 우리의 능력을 시험에 들게”5)하기 때문일 테다. 『쓰레기』의 저자 브라이언 딜의 문장을 따라 더 나아가, “모든 풍경은 쓰레기 풍경이다. 이 풍경은 세계를 광대하면서도 고르지 않게 분포된 하나의 쓰레기 더미로 변모시킬 뿐 아니라 감지할 수조차 없는 방식으로 자아와 인간에 대한 우리 감각을 변형한다.”6)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말이다.
이 ‘쓰레기 풍경’은 행사를 구성하는 동명 소설에서 김초엽이 그리는 장면과 연결될 것이다. 웹에 게재되어 행사 중 해파리의 연주를 듣는 것과 함께 읽히도록 의도된 김초엽의 단편소설에는 ‘플라스틱 아일랜드’라 불리는 쓰레기 섬에서 온갖 합성수지로 이뤄진 무기질 생명체가 탄생하는데, 이 “플라스틱과 비닐 쓰레기로 만든 엉성한 드론들”7)이자 “그냥 쓸모없는 플라스틱과 비닐 쓰레기를 뭉쳐 만든 어설픈 로봇”은 작중의 거대기업인 ‘시놉시스’ 하에 운영되는 미래도시를 방해한다. 아니 사실 ‘방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을 텐데, 외형이 닮은 덕에 해파리라고 불리는 이 “너저분하고 유연하고 흐느적거리는 기계들”은 적극적인 방해 의도를 띠고 전략적으로 도시에 간섭한다기보다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증식할 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러한 미래는 사실상 사방에 쓰레기가 널린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8)는 만큼, 도심의 ‘쓰레기’들이 현대에 그래온 것처럼.
다만 “쓰레기와 오물, 더러운 것과 청결하지 못한 것은 진보한 사회의 도달점으로 여겨지는 전체주의 질서에 끈질기게 저항하는 상징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상상된 세계는 아주 많이 남았을 수도, 당장 내일일 수도 있을 미래를 가리켜 보인다.”9)고 할 수 있을 때,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은 이 쓰레기-해파리들에게 정치적 투쟁의 기호를 강하게 덧씌우지는 않는다. 애초부터 “그것들은 쓸모없고, 아무 기능이 없고, 애초에 기능을 가지려는 의지가 없었으니까.” 도리어, 도시는 만개한 해파리들을 어떻게든 안티-시놉시스로 규정해 제거하려고 애를 쓰다가 실패하면서 스스로 고장나버린다. 앞서 딜이 쓰레기가 “우리의 능력을 시험에 들게” 하거나 “우리 감각을 변형”한다고 말했을 때, 이들 쓰레기-해파리들이 진정으로 방해하는 대상은 곧 1부에서 모리와 소라, 또한 (흥미롭게도 배경 연도인 2087년의 웹이라 하기에는 그로부터 한 세기쯤 전의 PC 통신 단말과 닮은) 2부에서 BloomingJelly가 감지하듯 어떠한 ‘생각’ 그 자체다: “쓸모없는 것은 정말로 쓸모없는 것일까?”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에서 구제에 대한 첫 번째 기미는 바로 여기서 찾아진다. 윌리엄스에 의하면 salvage라는 단어의 뜻은 1차 세계대전 중에 ‘(인양한 침몰선에서 이뤄지는) 가치의 이송과 교환’에서 ‘쓰레기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것’으로 전환되었는데, 병사들이 전례 없는 대재앙의 한복판에서 어떻게든 교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거리를 찾아다니다 못해 망가진 탱크의 부품이나 죽은 병사의 옷가지와 같은 쓰레기에마저 가치를 부여하게 된 것이다.10) 이때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이 영감으로 삼은 사이버펑크의 세계를 자본의 논리가 고장난 채로 가속하다 못해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에 경제적 가치가 부과된 곳이라 둘 수 있다면, 쓰레기 섬을 엄연한 생태계로 삼아 발생하는 이 존재들은 시놉시스의 구성원들이 익힌 체계로는 도무지 가치를 부여할 수 없으며 어쩌면 그렇기에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경제적 인식의 끄트머리에 있다. (“일단 시놉시스에 속하지 않은 도시 같은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던 소라가 이 쓰레기-해파리들을 막연한 미지의 영역에 두는 이유도 여기서 기인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아이러니하게도, 작중의 인물들은 이 쓰레기-해파리들의 ‘쓸모없음’에 저만의 쓸모를, 즉 무가치한 존재에 저만의 가치를 덧씌워 일종의 구제를 시도한다.
그러므로 다시금 파워플랜트에서 확인할 수 있던 ‘쓰레기 풍경’, 폐품들이 군데군데 흩어져 합성수지와 식물이 병치 된 무대를 곧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에서 묘사된 장면의 시각적 번역일 뿐 아니라, 전용(轉用)의 측면에서도 작중 인물들이 쓰레기-해파리에 쓸모를 부여하려는 구제 행위를 옮겨온 것이라고 둘 수 있겠다. 이 전용의 규모를 더욱 넓혀볼 수 있다면, 구제의 무대가 세워진 파워플랜트 또한 오래된 발전소 건물을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해 놓은 만큼 마찬가지의 구제가 이뤄지는 장소일 테고 말이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도록 하고, 이제 김초엽과의 협업으로 작업해 해파리가 올린 공연에서 구제에 대한 두 번째 기미를 찾아보려고 한다.11)
우선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면은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을 이루는 여러 문장이 발췌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때 김초엽의 문장들은 박민희의 목소리를 거친 발화와 가창의 형태로, 때로는 최혜원의 연주와 맞물린 전자적인 편집이 목소리 자체에 적용되어 쓰이는데, 이는 낭독처럼 작품의 내용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띠기 보았다기보다는 해파리가 제공하는 음악의 한 재료처럼 쓰이는 면이 다분했다. 달리 말하자면,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의 언어를 전용하며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의 음악이 성립되어, 두 작품이 상보적으로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이라는 행사를 구성한 격이다.
여기에 더해, 소설 텍스트의 활용에서만이 아니라 해파리라는 음악그룹 자체의 지향에서도 어떠한 구제의 기미를 확인할 수 있겠다. 박민희가 2010년대 동안 진행한 《가곡 실격》 시리즈의 실험을 바탕으로 2020년에 최혜원의 전통 타악·전자음악 연주와 함께 공연한 《남창가곡》과 뒤이어 2021년에 EP 단위로 발매된 [Born By Gorgeousness]까지, 해파리가 전통음악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말이다. 이때의 구제란 물론 쓰레기에 쓸만한 가치를 매기는 쪽이기보다는, 도리어 원뜻에 가깝게 전용과 발췌의 작업 등을 통해 가치를 새로이 교환해 보는 쪽에 가까울 테다. 종묘제례악과 남창가곡을 구성하는 여러 부품을 전통음악만의 체계에서가 아니라 해파리가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전자음악의 체계에서도 작동시킬 수 있도록, 다른 배치에 놓으며 새로운 쓸모를 생성하는 행위로 말이다.
해파리의 기존 작업에서 이 구제 행위는 박민희가 “예전 규칙을 신줏단지 모시듯 아무 도전도, 실험도 없는 상황을 보니 저라도 가곡을 흩트려보자”12)며 가곡을 ‘실격’시켰듯 관습의 방해로 작용할 수도 있는 한편, 최혜원과 함께 연주하는 편종과 편경 등 전통 타악기의 쓰임을 앰비언트·테크노 사운드에 맞춰 개조했듯 기능의 우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런 구제 행위에서는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가 윌리엄스의 논의를 받아와 쓰듯 “(그저 인용하기보다는) 용도 변경”하려는 목적을 찾아낼 수 있겠고, 덧붙이자면 “구제의 기예란 실용적인 구성물을 형성하도록 어떤 사물끼리 묶을지를 아는 것”13)이다. 그러니까, “각기 다른 영역에서 흥미로운 행보를 보이고 있는 두 아티스트/스튜디오/기업을 충돌시켜, 그들이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며 모호하지만 새로운 영역에 대해 탐구하고 공유하는 가치와 질문을 발견하는 과정을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한”14)다는 [Dialogue] 기획이 지향하는 바처럼? 그렇다면 해파리의 샘플 대상이 전통음악에서 SF의 문장으로 전환되고, 전자음과 함께 용도 변경된 ‘사물’들로 묶여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이라는 음악적 구성물이 형성된 셈이다.
따라서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은 작품 안팎을 구성하는 여러 구제 행위로 구성된 하나의 쓰레기 풍경을 청중들에게 소설과 음악 그리고 무대 공연의 형태로 제시하며, 우리가 애초에 무엇을 ‘쓰레기’라고 인지하거나 규정하고 이 가치 체계 속에서 어떤 쓸모를 부여하는지 재고하기를 제안한다. 그렇지만 각종 공업 용구가 아직 군데군데 널려 있고 콘크리트 벽에 부딪힌 잔향이 공간을 웅장히 채우는 옛 발전소에 주저앉아 온갖 폐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고 비닐 해파리들이 높은 천장에 매달린 무대를 올려다보자니, 왜인지 이 모든 광경의 구경꾼이 된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저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빠져나오라는 의미의 원칙”을 엄수하는 작중의 ‘도시탐사자’와 같은 기분에는 언제나 휩싸여 있긴 하지만, 내겐 언어와 음악뿐만 아니라 장소와 시각까지 맞물린 행사로서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이 구현한 쓰레기 풍경은 하나의 장관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시대에는 쓰레기를 이미지와 스펙터클로 포착할 수밖에 없는가?”15) 싶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이 “문제는 이러한 전용의 주체가 누구인가 (…) 개인의 욕망 혹은 그 욕망으로 포장한 자본에 의해 전유되었던 전통적인 레이브의 공간을, 대학이라는 기관이 공익을 위해 재전유한 파워플랜트라는 키메라가 탄생”16)했다는 점에 있겠다. 그렇게 따져보자면, 기능 전용이 키메라처럼 뒤엉킨 파워플랜트의 쓸모는 이곳을 또 다른 구제 대상으로 삼아 여러 예술형식과 주제를 결합해 만들어진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의 가치와도 제법 어울리기도 한다. 폐품·발전소·전통음악·사이버펑크 등 오래된 것들의 쓸모를 전용할 뿐 아니라 그렇게 용도 변경된 것들을 하나로 묶었다는 점에서 행사 전체에서 구제의 성질을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과연 이 구제에서 정말로 작중의 해파리들이 그러듯 “세상을 멈춰 세울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찾아낼 수는 있을까? 어쩌면 딜이 주장하듯 관조를 통해 이 쓰레기 풍경과 거리를 두며 “현재 및 현재와 연결된 미래가 존속하리라고 믿을 수 있어야, 일정 수준의 사회적·경제적 특권을 보유한 덕분에 쓰레기가 망가뜨릴 수 없는 안전한 공간(다른 환경에 처한 타인들은 고통받을 것이 뻔하지만)에서 사색을 이어갈 수 있어야”17)만 이러한 구제들이 성립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거대한 무대에서 발견한 폐품들은 으레 쓰레기가 그러듯 이물질이 묻거나 악취를 풍기지는 않았고, 다만 차라리 쓰레기를 뜻하는 기호로서 놓인 것도 같았다. 공연이 끝난 뒤, 이 폐품들의 쓸모는 내가 발전소 한구석에 놓인 휴지통에 던져넣은 사이다 페트병이나 샌드위치 포장지와 동일한 ‘쓰레기’로 바뀌었을까?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에서 소라는 쓰레기-해파리를 만나고 달라진 모리를 보며, 도시탐사자로서 그들이 어떤 쓸모가 있던지를 되짚는다. 만약 “모리가 하는 일은 시놉시스의 보안상 결점들을 보완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고, 모리가 다녀간 장소 중 일부는 유명해져서 몇 년 뒤에 잘 포장된 관광 상품이 되었다”면, 모리의 쓸모란 다름 아니라 “도시탐사라는 비즈니스에 활기를 불어넣는 존재”일 뿐이다. 쓸데없음을 정의하기 위해선 언제나 쓸모가 필요하며, 그 가치 체계에 묶여버리는 순간 쓸데없음엔 쓸모가 무엇인지를 역으로 드러내는 귀중한 쓸모가 생긴다. 도시탐사자들의 행위가 “표면적으로는 이 도시를 통제하는 시놉시스에 대한 저항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스펙터클을 팔아 생존하며 시놉시스의 체제를 굳히는 일”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무엇보다, 그들이 폐허에 “어디까지나 ‘관찰자’로서 다녀갈 뿐이라고 강조했고, 관찰자들은 아무것도 파괴하거나 개입하지 않았다”는 만큼.
윌리엄스는 구제와 샐비지-펑크를 분명하게 구분 지으며 “구제에다 펑크를 더하는 것이란 그것을 철저하게 점유하는 것(to occupy it too well), 게임의 논리 바깥에 서있기만 하는 아니라 지평선 멀리까지 그 논리를 따라가는 것”18)이라고 강조했다. 전쟁터의 폐허에서 가치 있을 만한 걸 찾아다니던 이들이 쓰레기까지도 구제해 버렸듯, 샐비지-펑크는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의미에서) 구제의 논리 자체를 일관적인 지점 너머로까지 끄집어내는 것”이며, “세계가 이제 종말론적 불모지의 꼴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구조화되었다는 간단한 인식으로 구제를 망가뜨린다.”19) 이때의 샐비지-펑크는 구제의 뜻이 한참 전부터 이전 같지 않아졌다는 사실을 전면화하며 현재를 다시 비춰보게 한다. 단지 쓰레기를 용도 변경하는 것만으로도 특정한 가치가 잔뜩 발생한다면, 또 그런 쓰레기가 범람하는 것만으로도 도시가 기능부전이 된다면, 이는 세계가 쓸모의 끄트머리까지도 가치화했다는 동시에 그런 가치 체계로 작동하는 세계가 거대한 쓰레기 풍경이 되어버렸다는 의미일 테므로. 그러니까,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에 빗대자면 “태생부터 오류와 우연으로 인해 생겨난 존재”들을 현행 가치 체계에 따라 철저히 쓸데없는 것으로 취급하자 도시 전체가 마비되는 것처럼. 어쩌면 결말에서 밝혀지듯 기능도 목적도 없이 존재하는 쓰레기-해파리들의 유일무이한 규칙을 따라 그 어떤 쓸모도 무쓸모도 부여하지 않은 채 “우리가 멈추면, 그것들도 떠난다”는 것처럼? 아니면 해파리의 음악이 그리 작동하듯, 전자적인 사운드 위에서 전통음악의 규칙들을 충실하게 따르면 따를수록 그 관습 안쪽에서 크고 작은 오류가 일어나는 것처럼?
샐비지-펑크를 “기호가 호환 가능한 데에 비해, 사물에는 특유의 속성과 질감과 경향이 있”20)기에 전자보다는 후자를 다루는 기예라고 두었던 피셔를 따라가자면, 《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이라는 행사에는 쓸모나 가치를 부여할 만한 기호와 사물 모두가 해파리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말끔한 폐품’처럼 사물에 기호가 덧씌워지는 한편, 사이버펑크나 전통음악을 구성하는 기호가 문득 제 구체적인 물성을 드러냈으며, 무엇보다도 이 모두를 안쪽에 담은 파워플랜트에는 발전소라는 육중한 사물과 복합 문화 공간이라는 거대한 기호가 한자리에 겹치고, 결국 모두가 얽히고설켜 거대한 키메라가 된 듯했다.21) 여기서 일어난 크고 작은 구제가 (1부의 끝자락에서 소라가 느끼듯) “그 일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지금부터 어떤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것 이상으로 (2부의 끝자락에서 BloomingJelly가 쓰듯) “당신의 뇌와 칩 속에 뿌리박고 있는 관점을 해킹”하기 위해서는 단지 쓸모를 전용하고 가치를 재부여하는 것 이상으로, 구제 자체를 구제하는 샐비지-펑크의 기예가 필요하겠다. 만약 내가 이 근사한 쓰레기 풍경에 관찰 이상의 개입을 할 수 있다면, 상호 구제의 스펙터클로 작동하기도 했던 이 행사에서 구제할 만한 걸 찾아낼 수 있다면, 구제하는 것과 구제된 것들에 아름다운 쓸모 이상의 무언가를 부여하기를 덧붙이고 싶다. “쓰레기의 스펙터클은 우리가 쓰레기와 더불어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마도 진로를 바꾸는 것이리라는 사실을, 쓰레기를 매혹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면서 쓰레기를 통해 우리의 길을 찾아보도록 노력하는 것이리라는 사실을 대면하게 만든다”22)니까. 건물 밖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가 거쳐 간 장소들에 이미 온갖 쓰레기가 해파리처럼 만개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