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전시장에 들어서자, 어둠처럼 칠해진 벽이 늘어선 것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둠은 분명 빛의 결핍일 텐데, 그것을 재현하는 데는 꽤 많은 잉크와 그걸 펴바르는 노동력이 요구된다. 아주 깨끗하지는 않은 만화 펄프지라도, 어둠을 채우는 데 드는 특별한 형태의 공정과 정성은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전해지기 마련. 회색도가 높은 페이지에 머무르는 눈의 시간이 훨씬 길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안다. 가벽 패널 중간중간에는 조명을 받은 만화의 페이지가 한 장씩 배치되어 있었다. 마흔여덟 개의 패널(패널은 만화에서 칸이란 뜻이다.)은 중편만화를 담기 모자람 없었다.
페이지에는 페이지 번호가 적혀 있지 않았다. 벽을 따라 만화를 읽어가면서도 제대로 된 순서대로 읽고 있는지, 빠진 페이지가 있지는 않을지 걱정이 뒤따랐다. 만화를 읽는 독자는 늘 걱정하는 것이다. 글을 읽느라 놓친 그림이 있지는 않을까, 그림을 따라가느라 놓친 글자가 있지는 않을까 하고. 가뜩이나 이번 경우에는 한 손에 쥐이는 사이즈가 아니고 내 몸보다 훨씬 큰 책이다. 거기 둘러싸인 채 간파하기는커녕 간파당하고 말 것 같다. 물론 내가 어떤 걸 놓치고 어떤 걸 취하는지에 따라 이해의 양상은 판이해질 테고, 그것을 건축가(들)와 만화가(들)는 노렸는지도 모른다. 웃고 있는 그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계속 만화의 벽을 따라 걸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숲’이다. 이곳도 해가 넘어가고 있는 시간의 숲을 닮아 약간의 빛이 있지만 상당히 어둡다. 그물망을 덧씌워 관객들 머리 위로 잎사귀 무늬 그림자를 드리우는 안쪽 공간에 다다랐다. 꽤 널찍했는데도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숲의 안쪽에 왔다는 안도감과 얼마만 한지 모르는 숲 한가운데 있다는 막막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다행인 것은 숲의 안쪽에 만화책이 몇 권 놓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책’은 늘 굉장한 위안을 준다. 이 전시장에 도착한 이상 이들이 가공한 이야기를 편파적이나마 이해하고 싶었는데, 책을 쥐자, 쥐어지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불안을 누그러뜨렸다. 나중에 구조물의 설계도를 보고 나니, 유선형 벽체가 띠는 전체적인 형태는 숲이라기보다 ‘잎사귀’에 가까움을 알았지만, 잎맥을 그리는 한 장 한 장의 만화는 충분히 하나의 줄기이자 나무가 돼주고 있었다.
한편 만화의 배경에 계속 시선이 가닿았다. 나의 짧은 만화 관습 속에서, 실사로 만든 배경이란 만화가의 게으름, 근본적으로는 이를 초래한 만화라는 고강도 작업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꽤 부지런히 ‘배경’을 중요한 오브젝트로 다루고 있다. 변형된 실사 이미지가 소년의 몸이 되기도 하고 숲의 퇴적물이 되기도 하고 숲의 정령이 된다. 다른 작업방식, 다른 연원을 가진 이미지들이 한 패널 안에 덧붙을 때, 그 조화롭지 않은 만남에서 숲의 무너짐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배경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거기 들여다보는 관객 이미지가 겹치기도 했다. 손안에 쏙 들어오지 않는 만화를 보는 데 따르는 재미가 쏠쏠했다. 벽을 따라 걸음으로써 만화의 진행에 참여하는 독자는 자연히 작품 속 주인공, 즉 탐험자가 되었다. 걸을수록 숲을 볼 것이고, 숲에 대한 이해가 높아질 것이며, 그만큼 헤어짐이 가까워질 것이다. 모든 책에는 마지막 페이지가 있듯 이 거대한 만화책에도 출구가 있을 테니까. 반대편 마을이 궁금한 주인공 소녀는 숲을 통과해야 한다는 과제에 가로막힌다. 그러나 통과한다는 것, 관통한다는 것, 제한된 동선 내에서 부분을 더듬을 뿐인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지?
알 수 있다. 만화이기 때문이다. 만화 안에서는 GPS 없이도 늘 내가 있는 곳과 내가 가야 할 곳을 찾아낼 수 있다. 만화 안에서는 길을 잃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제대로 왔다는 걸 어떻게 아냐고? 소녀가 소년과 만났기 때문이다. 이 만남이 숲의 정가운데가 된다. 반대편 마을, 반대의 세계, 새로운 인간을 대변하는 한 소년. 그는 흔적으로 소녀에게 말을 건다. 사슴의 뿔, 호박석, 나무껍질, 엉킨 털, 가죽, 부스러기, 거미, 줄…… 살아 있는 나무가 아니면서도 숲을 덮고 숲을 이루고 숲을 대변하는 것…… 그런 것들에 소년은 메시지를 적고, 소녀는 이를 곰곰 해독한다.
“이 숲에서 혼자 바닥에 누워 위를 올려다보곤 했지. 언젠가 숲을 벗어나 하늘에 가까워지고 싶었거든. 그런데 어느 날, 하늘의 별이 떨어졌어. 팔 하나가 완전히 날아갔어. 그다음에는 밤의 천둥이, 우박이, 마지막에는 숲과 하늘의 조각이 떨어졌고… 몸의 절반이 날아간 후에야 숲은 나를 불쌍히 여겨 말을 걸었어. 미안해, 너였구나. 망가진 네 팔과 다리와 몸통은 고쳐줄게. 그렇지만 나는 앞으로도 계속 무너질 거야. 아마도 네가 여길 떠날 때까지.”
반대편 마을 출신으로 짐작되는 소년 역시 숲의 퇴적물이자 숲의 일부다. 숲은 소녀를 기다리면서도 매일 무너져간다. 소녀가 아는 만큼 균열이 생긴다는 듯이. 소녀가 새로운 세계를 배우는 만큼, 이미 존재하는 세계는 무너지며 형태를 바꾼다. 이것은 꼭 전시장 같지 않은가. 무너지기로 한 숲처럼, 모든 전시공간은 지나치게 한시적이다. 전시가 끝나면 해체되고, 다시 쓰이거나 버려지거나 다른 형태로 재조립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알던 형태의 그릇이기를 미련 없이 포기한다. 한 장의 페이지를 품은 이 견고한 벽들도, 전시기간에만 그 꼿꼿함을 유지할 것이다. 보여주기로 한 사람에게만, 보고 싶다는 사람에게만, 자신을 오픈하면 그만, 그 이상의 생존은 자기 자신조차 관심도 의무도 없다. 그 안을 더듬고 탐구했던 우리 모두의 기억만이 우리 세포 어디엔가 남아 우리를 구성한다. 그러고 보면 만화책은 종이에서 시작한다. 종이는 나무에서 시작한다. 잘려나간 숲이 얇게 갈려 종이가 되고, 그 위에 다시 숲이 그려진다. 이 책은 나무를 죽였지만,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이 책으로부터 숲의 귀함을 배우기도 하는 것이다. 숲의 기억을 품은 종이는, 숲이었을 때는 양분이 됐을 빛에 의하여 누렇게 변색되고, 시간이 지나 가장자리가 바스라진다.
“네가 돌을 던지지 않고 내가 너를 쫓아가지 않았다면 우린 서로 몰랐겠지.”
소년은 여기저기 메시지를 남기고 소녀는 그것을 읽는다. 저자와 독자처럼. 다른 시간대에서 메시지가 전송된다. 그런데 소녀는 저자를 지금 여기서 만나고 싶어진다. “잠깐, 도망가지 마! 그동안 계속 생각했어, 네 얘기를 다시 한번 듣고 싶다고! 이런 데 새긴 편지 같은 거 말고, 직접,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서 말이야!” 그때 거기의 존재를 지금 여기로 불러오려는 열정. 소년은 얼굴을 보여준다. “여기가, 워, 원래 내가 살던, 곳이야…”라면서 말을 더듬는, 얼굴에 멍이 들어 있는, 남들보다 날개뼈가 조금 튀어나온, 그는 숲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 ‘있다’. ‘앞으로 얼마만큼 더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라고 소녀는 독자에게 미소로 묻는다. 이렇게 이야기는 끝난다.
물론 우리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우리가 무너뜨리면서 알고자 하는 세계는 어떤 것인가에. 뜯겨져 나온 책의 페이지들을 수집하면서. 그래도 우리는 얼마나 가난한 자료실에서든 우리의 이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은 존재일 것이니까. 그리고 모든 존재는 증거를 남기는 법이다.